• 인스타그램
  • 뉴스레터
  • 모바일
  • Play
  • 웰빙
  • 누군가에겐 마실, 또는 신부수업...공유부엌에서 ‘힐링’
  • 2017.04.10.
-서울 강동구 공유부엌 ‘청년식탁’가보니

[리얼푸드=박준규 기자] 주방과 군대의 한 가지 공통점은 위계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주방에서 통용되는 질서의 꼭대기엔 ‘셰프’가 있다. 주방장은 저마다 역할을 맡은 조리원들을 때론 다그치고 또는 가르치며 하나의 요리를 만들어 낸다. 군대로 치면 총사령관쯤 된다.

하지만 리더 없이도 잘 굴러가는 주방도 있다. 누군가가 재료와 조리과정을 통제하지 않아도 여러 손길이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어가는 곳이다. 물론 시행착오를 피하긴 어렵다. 그래도 이곳 주방에 모인 사람들은 “그 과정 자체가 즐겁다”고 말한다. 2030 청년들로 구성된 강동구 ‘청년식탁’ 청년들의 이야기다.


청년식탁 청년들이 더불어 만든 요리를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지난 4일 오후, 서울 강동구 암사동 암사종합시장을 찾았다. 저녁 식재료를 사려는 손님들로 시장 안은 제법 붐볐다. 이곳 시장 건물 2층엔 ‘암사 공동체 마당’이란 공간이 있다. 130㎡(약 40평) 정도의 공간은 부엌과 다용도실 등으로 꾸며졌다. 청년들은 지난해 10월부터 매주 화요일 저녁 이곳 공유부엌에서 만나 함께 밥을 지어 먹고 사는 얘기를 나눈다.

10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식탁 위엔 갖은 식재료가 널브러져 있었다. 홍합, 청경채, 우동면, 찹쌀가루, 돼지고기, 갖은 야채들이었다. 청년식탁 원보라(32) 씨는 “오늘 테마는 중화요리어서 짬뽕과 탕수육을 만든다. 재료는 모두 암사종합시장에서 산 것들”이라고 말했다. 다른 2명의 청년들은 채소와 홍합을 다듬으며 기본 준비에 집중했다.

이날 청년들이 짬뽕과 탕수육을 만드는 데 사용한 식재료. 모두 암사종합시장에서 산 것들이다.
시곗바늘이 8시를 넘기자, 하나 둘 청년들이 더 모여 8명으로 불었다. 대부분 암사동, 천호동에 살지만 구리나 강남에 사는 청년들도 있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 무섭게 손을 씻고 부엌 풍경에 녹아들었다.

이날 처음 청년식탁을 찾은 고홍석(32) 씨도 마찬가지였다. 동아리 정보를 공유하는 모바일 어플리케이션(‘소모임’)에서 청년식탁을 알게 됐다는 그는 “요리하는 법을 좀 익혀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찾아왔다”고 말했다.

이들의 손길은 생각(?)보다는 서툴렀다. 흰 가루를 가리키며 “이게 소금이야 설탕이야”, “튀김옷을 어떻게 만들지” 따위를 묻는 청년도 있었다. 서로 일러주고 의견을 나누면서 길을 찾아갔다. 서너명은 스마트폰으로 레시피를 참고하며 짬뽕 국물맛을 내느라 분주했고, 나머지는 손질한 돼지고기에 반죽옷을 입혀 튀겨냈다.

원보라 씨는 “일사분란하게 하진 못하지만 결국엔 꽤 맛이 나는 게 신기하다. 단지 만들어진 것을 먹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까지 경험하는 게 참 좋다”고 했다.

암사동에 사는 임선영(26) 씨는 “요리엔 재주가 없지만 다른 청년들과 저녁을 만들면서 신부수업도 하는 느낌”이라며 “직장 구내식당이나 편의점 도시락보다 훨씬 즐거운 식사다”고 말했다.


청년들이 음식을 마련하는 모습. 이곳엔 요리를 주도하는 누군가는 없다. 대신 둘러모여서 방법을 찾아간다.

장장 65분 정도 조리시간을 거친 저녁상이 차려졌다. 짬뽕과 탕수육 그릇만 올려진 식탁을 바라보며 한 청년이 “단무지라도 좀 살 걸”하고 외치자 다들 크게 웃었다.

기자도 이들 틈에 끼어서 음식 맛을 봤다. 일반 짬뽕은 중국식당에서 파는 것보다 국물이 순했고 면도 잘 익어서 맛있게 먹었다. 탕수육은 고기를 너무 잘게 자른 것 빼고는 훌륭했다. 1시간 걸려 만든 음식들은 10분만에 자취를 감췄다.

공유부엌은 상당히 깔끔한 환경을 자랑한다. 조리대는 제법 널찍했고 가스레인지, 전자레인지, 냉장고, 정수기를 갖췄다. 프라이팬과 냄비, 접시도 사이즈별로 충분히 구비돼 있다. 청년들 말고도 다른 지역 공동체들이 이 공간에서 저마다 활동을 하고 있다.

강동구 도시재생지원센터 조원석 주무관은 “기존 시설을 걷어내고 부엌과 다용도실을 조성하는 리모델링 공사에는 총 3000만원 넘게 들어갔다”고 설명했다. 매달 임대료(130만원)은 강동구청이 지원한다.

사실 청년식탁은 구청의 지원을 받기 전인 2015년 처음 조직됐다. 청년 1인 가구들이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낀 청년 몇이 의기투합한 것. 하지만 모여서 조리할 마땅한 공간이 없어 경로당을 빌려서 쓰던 시절도 있다. 지금은 청년들은 매주 1만원을 모아 재료를 조달하고, 전기사용료 등을 낸다.

올해 1월부터 참여하고 있는 양승환(26) 씨는 “이런 공유부엌이 곳곳에 더 많아져서 청년들이 마실하듯이 가벼운 마음으로 나와서 요리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nyang@heraldcorp.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