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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놀듯이 즐기면 저절로 요리가 됩니다”-문성희 자연요리연구가
  • 2017.04.21.
- ‘주방 이방인’에 머물던 남성들을 위한 문성희 요리교실
- 레시피엔 정도 없어, 입맛에 따라 요리하는 게 더 중요

[리얼푸드=박준규 기자] 지난 17일 전국에 봄을 알리는 부슬비가 내렸다.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주택가에도 빗소리가 가득했다. 모던하게 지어진 4층짜리 건물 2층에 ‘평화가 깃든 밥상’이란 곳을 찾았다. 자연요리 연구가 문성희(67) 씨가 운영하는 주방이자 식당, 교실이다.

문성희 씨는 기자에게 따뜻한 차부터 권했다. 유근피, 구기자, 오가피, 당귀 등 8가지 약재를 우린 국물이다. 한약방에서 나는 향과 비슷했다. 한 모금 마셨더니 입안이 개운해졌다. 문 선생은 “이곳에선 이 국물로 밥도 짓고 음식을 만든다”고 소개했다.
서대문구 연희동에 있는 ‘평화가 깃든 밥상’.

인테리어는 정갈함 그 자체였다. 하얗게 칠한 벽에는 소박한 액자 몇 점이 걸려있고 식탁과 의자, 장식장 등 집기와 각종 식기의 디자인은 단순했다. 군더더기를 찾기 힘들었다. 번잡한 마음이 절로 가라앉았다.

이날 이곳에선 조촐하게 조리수업이 열렸다. 올해 ‘조리하는 대한민국’을 화두로 내건 국제슬로푸드한국협회와 문성희 선생이 의기투합해 매달 한 번 만나서 수업을 진행한다. 이 조리교실이 특별히 관심을 두는 건 남성들에게도 조리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현재는 김종덕 회장, 고재섭 상임이사를 비롯한 협회 남성 이사들이 늘 참여하고 그때그때 일반 참가자들도 모집한다.
문성희 자연요리 연구가(오른쪽)가 조리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문성희 선생은 “사회적으로 퇴직한 사람들, 혼밥족들, 맞벌이 부부들이 늘어나면서 (정성들여) 음식을 만든다는 관점이 흐려졌어요”라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특히 평범한 남성들에게 조리는 여전히 낯선 영역이죠. 그들 안에 숨어있는 여성성을 찾는 것도 (수업의) 중요한 목표”라고 말했다.

오늘의 밥상은 ▷뿌리채소밥 ▷감자찌개 ▷콩장 ▷가지고추장구이로 구성됐다. 문 선생은 “이곳의 밥상은 아주 간단합니다. 작은 접시에 밥과 반찬이 모두 담길 수 있어야 하고 재료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짜지 않게 만듭니다. 그러면서도 영양소는 골고루 갖춰야 하고요”라고 설명했다. 조미료 같은 장식적인 요소를 최대한 걷어낸 ‘자연요리’ 그리고 시간을 들여서 만들고 먹는 ‘슬로푸드’를 두 가지 축으로 삼았다. 식재료는 각지의 농부들이 재배한 유기농 재료를 직접 받거나, 한살림 등 생협에서 구해온다.

문 선생은 참석자들과 뿌리채소밥 만들기부터 시작했다. 연근, 아스파라거스, 당근 같은 뿌리채소를 살짝 익힌 뒤, 쌀과 함께 쪄내는 훌륭한 영양밥이다. ‘파스타처럼 밥도 그 자체가 하나의 완성도 있는 요리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이 담겨있다.
참석자가 뿌리채소밥에 들어갈 우엉을 썰고 있다.

참석자들은 각자 연근, 아스파라거스, 당근을 써는 연습부터 했다. ‘연필깎이 썰기’를 해야 했는데 남성 참가자들은 칼질은 어색하기만 했다.

조리 방법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식으로 수업이 진행되지 않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문성희 선생은 “두릅은 향이 강한데 같이 넣을까요?”, “채소를 익힐 때 기름을 넣을까요 말까요?” 하면서 참석자들의 의견을 이끌어냈다. 가벼운 토론 끝에 채소는 기름없이 소금만 조금 뿌려서 볶고 두릅은 밥엔 넣지 않되, 익혀서 반찬으로 먹기로 했다.

문 선생은 “레시피엔 정도(正道)가 없어요. 각자의 입맛에 따라 재료를 넣거나 빼고, 고춧가루나 간장도 얼마나 넣을지를 고민하고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밥이 익는 동안, 감자찌개를 만들었다. 물에 감자와 풋고추, 고춧가루만 넣고 간장과 현미유로 간을 살리는 게 레시피의 전부다. 고추장을 넣으면 찌개에서 텁텁한 맛이 나기 때문에 고춧가루가 더 낫다고 한다. 
완성한 밥과 찌개, 반찬을 정갈하게 접시에 담았다.

콩장을 만드는 방법도 지극히 간단했다. 콩(백태, 메주콩, 선비콩 등)을 프라이팬에서 약불에 볶은 뒤 간장에 섞어 30분 정도 재워두면 끝이다.

메인 반찬이 될 가지고추장구이로 설명이 이어졌다. 오늘 메뉴 가운데 그나마 간이 들어가는 메뉴다. 복잡한 건 역시 하나도 없었다. 한 마디로, ‘자른 가지에 고추장 양념장을 발라서 구워내면 되는’ 요리다. 문 선생은 참가자들에게 가지를 먹기좋은 크기로 자르고 길게 칼집을 내라고 했다. 양념장이 잘 스며들도록 하기 위해서다.

양념장은 고추장에 현미유, 원당, 간장을 섞어서 만들었다. 이 때 문성희 선생은 ‘고추장 테이스팅’을 제안했다. 밀고추장, 오곡고추장, 묵은 고추장 등을 조금씩 맛보게 하고 어떤 것으로 양념장을 만들면 좋겠는지 의견을 구했다. 고추장마다 맵고 달고 쓴 맛이 조금씩 달랐다. 결국 묵은 고추장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같은 고추장, 간장이더라도 종류에 따라 맛이 다 다르다는 걸 이해해야 한다”는 게 문 선생의 설명이다.

어느덧 조리를 시작하고 1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뿌리채소밥과 감자찌개는 먹음직스럽게 완성됐다. 동그란 접시에 뿌리채소밥을 먼저 담고 그 위에 콩장을 얹었다. 밥 주변에 가지구이와, 익힌 두릅, 삶은 양배추와 무를 배치했다. 감자찌개는 작은 접시에 따로 담았다.

조리교실 참가자들은 앞치마를 벗고 식탁에 둘러앉았다. 갖은 재료들이 요리하는 사람의 손길을 받아 근사한 요리로 바뀌어 있었다. 조리 방법은 물론, 마음가짐까지 배운 참가자들은 천천히 맛과 향을 음미했다. 허투루 씹어서 삼켜버리지 않았다.

문 선생은 “모두가 조리하는 대한민국을 만들려면 기본적으로 요리가 쉽고, 가볍고 재밌어야 해요. 요즘 음식엔 튀기고 지지고 볶는 과정이 너무 많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직장인들에게도 도시락을 권한다고 했다. 요리에 재미를 느끼게 하는 쉬운 방법이라는 생각에서다.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한 사람이 반찬 하나씩만 집에서 준비해서 같이 나눠먹으면 됩니다.”

nyang@heraldcorp.com

[사진=이상섭 기자/babtong@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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