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스타그램
  • 뉴스레터
  • 모바일
  • Play
  • WHERE TO
  • 요즘 화두 평양냉면, 평냉 성지는 어디?
  • 2018.05.02.
not
-조선후기 실학자도 냉면으로 속 풀어
-냉면, 조선중기 ‘계곡집’에 처음 등장
-다산 정약용도 냉면에 숭저 곁들여

남북정상회담에서 ‘평양냉면’이 화두가 되면서 냉면(冷麵)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냉면의 유래는 조선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냉면이라는 단어는 조선 중기의 문인 계곡 장유(1587∼1638년)의 계곡집(谿谷集)에 처음 등장한다. 장유는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 먹고’ 시에서 냉면을 먹으며 독특한 맛(異味)이라고 표현했다. 이 시로 17세기 초반에도 냉면은 있었으나, 그렇게 널리 보급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노포들의 성지인 우래옥, 을지면옥, 필동면옥의 냉면. ‘평냉 힙스터’들이 즐겨찾는 이곳 냉면은 젓가락을 놓고 뒤돌아서면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매력을 지녔다. [헤럴드경제DB]

18세기 이후부터 냉면은 조선의 문헌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다산 정약용은 18세기말 황해도에서 먹었던 냉면을 기록으로 남겼다. ‘다산시문집’에 나타나는 ‘납조냉면숭저벽’이라는 문구다. 정약용은 면발이 긴 냉면에다가 배추김치인 숭저를 곁들여 먹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실학자 영재 유득공의 ‘서경잡절(西京雜絶)’에도 가을이면 평양의 냉면 값이 오른다고 언급돼 있다. 음력 4월의 평양 풍경을 이야기하면서 “냉면과 돼지수육의 값이 오르기 시작한다”고 했다. 18세기 전후에 냉면과 함께 돼지고기 수육, 배추김치 혹은 김치(동치미)국물을 곁들여 먹었음을 알 수 있다.

평양냉면은 조선 중기 이후 널리 보급됐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규경은 평양의 명물로 감홍로와 냉면, 비빔밥을 꼽았다. 감홍로는 평양에서 담그는 40도가 넘는 독주다. 고기안주에 감홍로를 마신 후 취하면 냉면을 먹으며 속을 풀었다고 해서 선주후면(先酒後麵)이라는 말이 생겼다.

조선 후기 냉면은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선물 품목으로도 올랐다. 조선 후기의 문신 유주목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매월 초하룻날, 최 승지 집에 가서 냉면을 선물로 드렸다”고 기록했다.

도공 출신으로 분원을 운영했던 하재 지규식은 “종로에서 냉면을 사먹었고 냉면값이 1냥”이라고 명기했다. 소설가 이무영은 ‘영남주간기(동아일보 1935년 5월)’에서 “경남 의령에서 한밤중에 냉면을 배달시켜 먹었다”고 했다. 경성, 평양 뿐만 아니라 남쪽의 지방도시에도 냉면배달은 흔한 일이었다.

한편 서울의 냉면집에서는 불고기와 냉면, 수육과 냉면을 같이 팔았다. 자연스레 ‘먼저 불고기와 수육에 술 마시고, 나중에 냉면을 먹는다’는 선주후면이 하나의 식도락 문화로 자리잡았다.

냉면집은 1960~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고, 그 이후에 쇠퇴한다. 고깃집에서 싸구려 냉면을 싼 가격에 내놓으면서 전통 냉면집이 외면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과거의 명맥을 지키고 있는 서울의 냉면 전문점은 을지로와 그 인근에 몰려 있다. 1946년에 개업한 우래옥이 있고, 1970~1980년대 개업한 필동면옥ㆍ을지면옥ㆍ평양면옥 등이 있다. 이곳들은 ‘평냉 힙스터’로 통한다.

박로명 기자/dodo@heraldcorp.com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