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스타그램
  • 뉴스레터
  • 모바일
  • Play
  • 헬스
  • [헤럴드광장] 반복된 자극은 반응을 무디게 한다
  • 2023.04.14.

최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저항하는 한 여자를 납치, 살인을 저지른 사건이 있었다. 서울 한복판, 그것도 주택가에서 일어난 일이라 충격이 크다. 가상화폐에 투자하면서 손실을 본 것에 대한 갈등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파악되며, 청부살인에 대한 가능성도 보인다. 이 자체로도 너무 충격적인 사건이지만 워낙 말도 안 되는 사건사고들이 발생하는 현실이기에 사람들은 이런 사건들이 주는 자극에 무뎌지고 있다. 반복되는 자극에 무뎌지는 것은 우리 몸을 보호하기 위한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다. 실제로 뇌에 같은 자극이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자극에 대한 반응이 점차 줄어든다. 아무리 강한 자극이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뇌는 이를 일상적인 자극처럼 받아들인다. 즉, 적응이 되는 것이다. 살인이라는 상상하기도 힘든 끔찍한 일이 뉴스, 영화 혹은 드라마에서 반복적으로 노출되다보면 그냥 ‘주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다.

잘 알려진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놀람반응(startle response)과 사전파동억제(prepulse inhibition) 현상이 있다. 강렬한 자극이 갑자기 발생하면 깜짝 놀란다. 이런 놀람반응은 외부 자극에 대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 현상이다. 하지만 강한 자극에 앞서 약한 자극이 가해지면 강한 자극이 가해졌을 때 강한 ‘놀람반응’이 나타나야 함에도 약한 반응을 보인다. 이를 사전파동억제 현상이라고 하며, 한 생명체가 외부 자극에 대해 정상적으로 반응하는지를 판단하는 지표로 활용된다. 정신질환자 일부는 뇌의 시상 부위 손상으로 적절한 사전파동억제 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로 인해 반복적인 자극에 적응하거나 무뎌지지 않아 자신을 보호하는 장치에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다.

놀람반응과 사전파동억제와 같은 생리적 반응은 일종의 유기체인 우리 사회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일례로 최근 한일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일본과의 외교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이기에 작은 자극에도 국민은 큰 ‘놀람반응’을 보일 수 있다. 한일 관계를 이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무책임한 일일 수 있고, 지속해서 핵무기로 위협하는 북한을 염두에 둔다면 한미일 삼각관계 구축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이다. 하지만 그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더 신중할 필요는 있다. 정상 간 대화에서 갑작스럽게 특정 정책을 발표해 사회적으로 큰 자극을 주기보다는 그 이전에 위안부 혹은 강제징용자분들에게 양해를 구하거나 여론을 수렴하는 등의 사전행동을 통한 ‘약한 자극’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우리 사회에도 사전파동억제 현상이 적용될 수 있음을 인지하고, 갑작스러운 큰 자극보다 그 이전에 약한 자극을 주면서 놀람반응을 줄일 필요가 있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방어기제라 하더라도 자극에 대한 반응이 작아지는 것이 필요한 일이 있고, 반복되는 자극에 경각심을 잃고 무뎌져서는 안 될 것이 있다. 일본과의 관계에서 일제강점기 일본의 만행은 절대 무뎌지거나 잊혀서는 안 된다. 다만 외교 방향 혹은 정책수행에 있어서는 신중하고 전략적인 접근을 통해 국민이 크게 놀라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매끄러운 방법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권준수 서울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관련기사